꿈속에서 봤던 자작나무 껍질을 두른 나무는 자작나무였다는걸 오늘 알게됐다. 원래 자작나무는 대나무처럼 곧고 높게 하늘을 향해 뻗어나는데, 내 꿈에 나왔던 나무는 두갈래로 펼쳐져있고 키가 작고, 나뭇잎이 하나도 없다는게(죽은 나무였을까) 달랐지만.
혼자 인제에 가려고 했던 적이 있다.
인제까지 가는건 어렵지 않은 일이었지만 자작나무숲까지 가는 길이 당시엔 번거로운 일처럼 느껴졌고 그래서 포기하고 말았는데, 오늘 드디어 그 곳에 다녀왔다. 비가 많이 내렸고 우비 속에 몸을 숨겨서 비를 피하면서, 또 비를 맞으면서 숲길을 걸었다. 기분 좋은 일이었다. 하지만 안전한 집에 돌아와서는, 폭우때문에 손쓸새도없이 삶의 터전을 잃고 목숨을 잃었다는 사람들의 소식을 TV화면 너머로 보며 슬픈 마음이 들었다. 나한텐 안전하지만, 누군가에겐 안전하지 못하기도 하다. 나한텐 위로이고 위안이지만, 누군가에겐 재앙이기도 하다.
가평, 홍천을 지나 인제까지 가는 길에 나는 한좌석만 있는 자리에 앉아있었다. 선생님을 옆에 태우고싶었지만 옆자리가 없었다. 그래서 Y를 생각했을까. 가평에서 다녔던 고등학교, 부모님과 살았던 군인아파트, 홍천에 있을 때 살았던 외갓집을 옆자리에 나를 태우고 쏘다녔던 그 미친놈을.
언젠가 노트에 ‘내가 원하는 사람은’이라는 제목의 아주 짧은 글을 쓴적이 있다. 아마 그를 만나기 전이었을 것 같다. 내가 원하는 사람은 편의점에서 나란히 앉아 라면을 불어먹고, 막차를 놓쳤을 때 나를 데리러와줄 수 있는 사람이라고 적었다. 선생님한테 갔다가 바로 쫓겨나서 다시 기차를 타러 간 역에서 보았던 장면이 그 글에 기억의 책갈피처럼 꽂혀버린 듯 했다. 역사 내 좁은 편의점에서 연인 한쌍이 어깨를 나란히 붙이고 앉아서 컵라면을 후후 불어먹던 그 장면. 언제였는지는 기억에서 잊혀졌지만 그 장면만큼은 내가 눌러쓴 글자에 봉인돼서 생생하게 살아있다.
막차를 놓쳤을 때 같이 살던 작은아빠, 그리고 고모는 한번도 나를 데리러 온적이 없다. 아니, 그 누구도 막차를 놓쳐 난처해하는 나를 구하러 온적이 없다. 그런 기억은 없다. 내 인생에서(적어도 내 기억에서) 나를 데리러 온, 나를 구하러 온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래서 나는 그런 사람을 그렇게나 원했나보다. Y는 무모하리만큼 가동력이 좋은 사람이었다. 내가 익산에 있던, 경주에 있던, 제주에 있던 그는 내가 부르면 항상 와줬다. 그런 그한테 빠지지 않는게 더 이상한 일이었을 것이다.
이제는 알 것 같다. 내가 원할 때마다 내 곁에 있어주고, 나를 지켜내줄 수 있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는걸. 그건 정말 판타지같은 일이라는걸. 그런 존재가 있다면, 딱 한 명 그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건 나 자신뿐이라는걸. 물론 인간이라는 한계때문에 완전하진 않지만, 하나님의 사랑만으로는 다 채우지 못해 사람의 빈자리를 비워두고 늘 기다리고 있는 나에게 ‘나’라는 존재는 잠재력이 가려져있었던, 과소평가되곤했던 객체이기도 하다.